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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한 숟갈
신형 그랜저, 모든 것을 새롭게 본문
지난 14일 현대가 신형 그랜저를 출시했습니다. 완전변경(풀체인지)된 일곱 번째 그랜저입니다. 첫 그랜저의 정통성을 이어받고 디자인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하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오페라 글라스(뒷유리 쪽창), 일자로 튀어나온 원-스포크 운전대, 그랜저 XG(세 번째 그랜저)를 상징하던 프레임리스(창문틀 없는) 도어에 최신화된 전장비를 함께 매달았습니다. 젊고 세련된, 우아한 모습의 더 뉴 그랜저(여섯 번째 그랜저의 부분변경 모델)와 반대 성향을 띱니다.
영화 작품에 비유한다면 그랜저 '리부트(Reboot)'를 시도한 느낌일까요? 컴퓨터에서는 '다시 시작', 순수하게는 '처음부터 다시, 모든 것을 새롭게'라는 의미로 통합니다. 기술의 발전, 문화 유행의 주기가 워낙 빨라서 변화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요즘 시선으로 옛 작품을 재구성해 신선함을 전달합니다. 옛 작품을 어슴푸레 알던 사람들에게 리부트된 작품은 세월의 흐름에 묻혔던 기억의 조각을 끌어모아 추억을 전합니다.
그저께 유튜브로 시청한 신형 그랜저 출시 생중계 영상이 '딱' 그랬습니다. 스마트폰과 TV 화면에 잡힌 그랜저는 분명 최신이지만 더 날렵하고 유선형 차체로 바뀌던 그랜저의 흐름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만들어도 잘 팔리는 그랜저의 구성에 많은 고민을 거쳐간 흔적이 엿보였습니다. 그랜저 고유의 연속성은 과감히 버리면서 앞뒤의 디자인 틀을 맞추고 레트로 감성을 연결하는 키워드는 무엇인지, 신기술을 어떻게 껴 맞춰서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낼지 각 담당자들의 머리가 복잡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영상에서 본 그랜저의 앞, 옆, 뒷모습은 전동화 모델(전기차) 대응을 위해 깔끔히 정돈돼 있었습니다. 스타리아 라운지처럼 한 줄로 쭉 뻗은 수평형 LED 램프, 다이아몬드로 수놓은 듯한 파라메트릭 패턴 그릴 장식, 문 안으로 숨었다가 불을 밝히며 나오는 플러시 도어 핸들, 돌출 부위 없이 수직으로 매끈하게 처리된 뒤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머플러 팁은 장식으로도 볼 수 없도록 꽁꽁 숨겼습니다.
외장 색상은 열두 가지나 됩니다. 기본 색깔은 어비스 블랙 펄, 세레니티 화이트 펄, 큐레아티드 실버 메탈, 트랜스미션 블루 펄, 녹턴 그레이 메탈릭, 바이오필릭 블루 펄로 여섯 가지이고요. 휠과 그릴, 앞뒤 브랜드 로고를 검게 칠한 버전이 두 가지(블랙 잉크 : 어비스 블랙 펄, 세레니티 화이트 펄 한정), 무광형 색깔이 두 가지(녹턴 그레이 매트, 유기 브론즈 매트), 우리나라의 전통과 자연을 담아낸 색깔 두 가지(유기 브론즈 메탈릭, 밤부 차콜 그린 펄)로 이뤄집니다. 놋쇠로 만든 방짜 유기, 짙푸른 대나무 숲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설명이 궁금했는데 아쉽게도 영상에서 이 색깔로 전시된 그랜저는 없었습니다.
실내 분위기는 뭔가 익숙합니다. 직전 모델인 더 뉴 그랜저의 틀에 옛 그랜저를 기억할 만한 요소들이 잘 보였습니다. 네모난 버튼을 모아두던 원 스포크 운전대, 대시보드를 수평으로 가로놓던 원목 장식, 역사다리꼴을 이루는 센터페시아 구성까지 1986 그랜저의 그때 그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헤리티지(Heritage) 감성은 자연에 벗 삼아 살아간 옛 조상들의 고택에서나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리부트된 그랜저에서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혹시 레트로 감성을 잔뜩 싣고 등장한 '헤리티지 시리즈 그랜저'를 알고 계시나요? 35년 역사를 써 내려간 옛 그랜저를 회상하며 공들인 전기 콘셉트 카였습니다. 어릴 적 봤던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시간을 역행하던 각진 자동차, 들로리안(DeLorean DMC-12)의 이미지와 묘하게 겹쳤습니다. 전기차로 변신한 들로리안은 과거를 찬미하던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지만 그랜저는 '온고지신(옛 것을 익혀 그것을 미루어 새 것을 안다는 뜻의 사자성어)'의 자세로 교감하며 '그땐 그랬지'로 추억하는 사람들의 든든한 지지와 관심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뿐이었을까요? '그랜저는 내연기관의 전동화 흐름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잘 보여준 사례였다고 생각합니다. 전동화라는 키워드는 지구에 세 들어 사는 우리 인간의 약속에 지나지 않지만 그 의지를 예술로 빚은 자동차는 사람들의 훌륭한 대화 수단이 됩니다. 과거의 흔적을 간직한 그랜저는 첨단화된 문명 기술을 받아들여 내일을 향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하나로 이어지는 12.3인치 화면 두 장, 대시보드에서 도어 트림 주위로 이어진 간접 조명, 나만의 작은 오페라 홀을 구현한 스피커 시스템은 유행에 꿀리고 싶지 않은 현대인들의 작은 소망을 드러냅니다.
어쩌면 신형 그랜저 출시를 말미암아 현대가 일종의 '빌드업(Build-up)'을 차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대략 2년 전 유튜브에 선보인 '내일을 향합니다(Next Awaits)' 필름은 진보를 위한 진정한 움직임을 풀어냈습니다. 영상을 되감기하며 시간을 되짚는 연출로 브랜드 정체성을 피력해 대중의 심금을 울렸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그 열망이 우리의 오늘이 됐다"는 내레이션 멘트는 7세대 그랜저에도 유효합니다. "우리 디자이너들이 미래를 그리려면 과거에 만든 것들을 되돌아보고 영감을 얻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했던 현대 내장 디자인 팀 관계자처럼요.
그랜저는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나란히 올랐습니다. 2.5 가솔린, 3.5 가솔린, 3.5 LPG, 1.6 가솔린 터보 하이브리드 네 가지 엔진을 품고 돌아온 그랜저는 다시 한번 시대를 앞선 진정한 대형 세단으로 거듭나길 원합니다. 영화 <어벤저스 : 엔드게임>처럼 지난 세대가 거쳐간 조각들을 한데 모으고 그랜저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남몰래 흘렸을 현대 디자이너들의 피땀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리라 자신합니다. 신형 그랜저 첫 사진에서 무심결에 '스타랜저(스타리아+그랜저)'라 여겼던 저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말이죠. 저는 리부트 된 그랜저의 웅장한 복귀를 환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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