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트 영화 시사회 다녀왔습니다
어제(17일) CGV 대구스타디움에 다녀왔습니다. 저녁 7시 30분 영화 '카운트' 시사회가 있었거든요. 작품의 배경은 88 서울올림픽 라이트미들급(계체량 67kg 이상 71kg 미만) 복싱 금메달리스트 박시헌 전 국가대표가 진해중앙고 복싱부를 떠맡던 1998년을 향합니다. 일선(시헌의 아내)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신발 투정하는 아들내미 키우는 낙으로 평범한 체육교사의 삶을 살고자 했지만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일부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10년 전 맞붙은 美(미국) 로이 존스 주니어와의 결승전에서 '명예롭지 못한 금메달', '편파판정 논란'의 그림자가 그를 계속 압박했으니까요. 모종의 부름을 받고 체육관에서 급조된 복싱부 학생들은 영화 '카운트'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려 했을까요?
세기말 배경으로 묘사된 1998년은 드라마 '응답하라 1998'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습니다. 야밤에 해안가 공원에서 세 얼간이가 본드를 흡입하려다 교사 박시헌(진선규)에게 걸려서 혼쭐나는 모습으로 얘기가 시작됩니다. 다음날 학부모들이 득달같이 학교 교무실로 달려와 교장(고창석)에게 "교사의 학생 폭력을 용납할 수 없다"라며 삿대질을 해댑니다. 당사자인 박시헌은 모르는 척 외면하다 "학부모들한테 좀 져 주라"며 질책하던 다른 교사에게 옮고 그름을 분명히 따집니다. 여기서 박시헌이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금방 감이 잡혔습니다. "아닌 건 아니다"라고 의사 표현이 뚜렷하고 심지가 곧은 분이더군요. 이런 사람이 왜 10년 전 편파판정 논란을 뒤집어쓰게 됐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집으로 퇴근한 박시헌은 영락없는 경상도 남자 그 자체를 보여줍니다. 엄마(일선=오나라)한테 혼나서 무릎 꿇고 벌서던 아들에게 장난치듯 살갑게 대하다 현관문 앞에 일선이 나타나자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라, 마!"라며 엄한 아빠 티를 냅니다. 아빠 아들 아니랄까 봐 개구쟁이 아들의 눈치가 꽤 빠르더군요.
집에서 정겹게 오가는 대화 씬(scene)에서는 압축률 높은 경상도 방언의 장점이 잘 드러납니다. 저녁상에서 박시헌이 "다 뭇다(다 먹었으니까 상 치워라)" 신호로 밥그릇을 싹 비우자 일선이 꽁지머리로 잡아맨 머리를 풀고서 숨겨놓은 연금 통장을 달라,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에둘러 말하기'를 시전 합니다. 감성 따위 안중에 없는 박시헌의 눈에는 일선의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카락이 그저 '짜파게티 한 뭉텅이'로 보였나 봅니다. 팔짱 끼며 지켜보던 관객들이 까르르 웃고 맙니다. 작품에 지뢰처럼 깔아 둔 일종의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 장치였을까요?
작품 속 웃음벨(웃음 장치)은 곳곳에 마련돼 있었습니다. 저처럼 마스크를 한 예비 관객으로서 작품을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시사회에서 더 냉정해지는데요. 만남의 광장으로 집어넣은 '호돌이 슈퍼' 씬은 가시 돋은 고슴도치로 지켜보던 제 두 눈과 경직된 입가의 긴장을 가끔 느슨하게 풀어줬습니다.
멜빵바지 차림의 박시헌의 친구가 평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내 인터넷에 만화를 올려볼 끼다"라고 말하자 "니는 그림에 소질 없다. 사방에 널리고 널린 게 만화 아이가? 사람은 사람답게 그려야지, 이게 뭐꼬? 니는 글렀다"라며 온갖 훈수를 두자 참다못한 호돌이 슈퍼 주인(이일화)이 빗자루를 휘두르며 박시헌을 벌레 잡듯 쫓아냅니다. 친구도 이건 아니다 생각했는지 다음번에는 라면 몇 봉지를 냄비째 끓여 먹으며 "한 번에 많이 먹는 모습을 보여줄 끼다"라며 먹방을 예고하던 모습이 나오기도 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갖다 끼워 맞춘 '트렌드(유행) 필살기'이기는 한데 영화계의 이런 접근이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마약반 잠입 수사보다 닭 튀기던 연출과 수원 왕갈비 통닭 제조 과정에 침 흘리며 열광했던 작품 '극한직업'을 알고 계신가요? 적어도 '카운트'라는 작품 안에서는 당시 박시헌이 마주한 주변 일상을 재관찰하며 관객들을 아무 생각 없이 웃게 만들고 때로는 감동과 쾌감을 더 박력 있게 전달하려고 낙차 큰 포크볼 같은 '변화구'의 효과를 노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맛이 나는 과일에 소금을 약간 쳐서 단맛이 더 잘 느껴지게 하는 것처럼 말이죠. 제 말이 이해가 되셨나요?
박시헌의 주변 인물 중 복싱부 제자로 등장하는 전학생 윤우(성유빈)와 환주(장동주)는 작은 슬램덩크를 보는 듯했습니다. 병원에 앓아누운 아버지의 치료비 마련을 위해 방과 후 중국집과 목욕탕 일감을 전전하던 '윤우'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속의 '송태섭'과 왠지 모르게 닮아 있었습니다. 원래 마산체고 소속의 선수였지만 주어진 각본대로 일부러 경기를 지고 나와야 하는 모습에 모멸감, 회의감을 느끼고 진해중앙고로 전학하며 복싱할 마음을 잠시 접는데요. 우연한 계기로 박시헌과 중국집에서 마주하며 진심이 담긴 복싱을 펼치게 됩니다.
윤우에게 라이벌 의식을 갖던 또 다른 전학생 환주는 어떻게 나왔을까요? 교내 불량 학생 3인방을 때려눕히다 박시헌에 딱 걸리며 학교 옥상에서 본보기로 매질을 당하는데요. 대뜸 박시헌에게 달려들며 "퇴학 시키주든가, 복싱을 시키주든가!"라고 말하던 장면이 나옵니다. 문제아로 불리는 도시의 양아치는 되기 싫은데 복싱 하나로 진짜 사람이 되고픈 까불이 '환주'는 빨간 머리로 대표되는 농구 천재 '강백호'를 살짝 떠오르게 합니다. 농구 코트에서 루스 볼(Loose ball)을 줍다 등을 다친 강백호의 연출처럼 '환주'도 8강을 치르던 링 위에서 상대 머리에 펀치를 날리다 손목이 꺾이고 맙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주눅 들 환주가 아닙니다. 부상 직후 건물 옥상에서 네온사인 불빛을 바라보며 윤우랑 나란히 아픔을 호소하더니 "내는 니 인정한다"라며 찐친과 같은 존재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가만 보면 박시헌의 부름 앞에 급조된 진해중앙고 복싱부는 '오합지졸' 그 자체로 보일 수 있는데요. 복싱이라곤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이들이 한데 모여 부둣가 타이어를 둘러업고 뛰는 훈련을 뛰고 일렬종대(앞뒤로 선 모습)로 나란히 잽(jab)을 날리며 성장하던 모습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슬램덩크의 일부분을 보는 듯했습니다. 처음에 "그렇게 해라 칼 때 안 하고 왜 인자 와서? 뭐 할라꼬?"라며 복싱부 설립에 이 악물고 반대하던 교장도 나중에는 학생들의 열정에 감복하며(진심으로 감동하며) 콜라와 치킨 무 많이를 실천하는 간식 배달부가 되기도 합니다.
박시헌이 선도하던 진해중앙고 복싱부는 그렇게 원 팀이 되어갑니다. 경남 복싱회장배 대회 결승전에서 마산체고를 상대한 진해중앙고는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잠시 흔들리며 균열이 생기지만요. 전국 대회 예선에서 본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는 더 굳세고 한층 단단해진 진해중앙고의 결속력을 보여줍니다. 술 한 잔 걸치며 고뇌하던 박시헌의 인간적 모습, 곁에서 그를 뒷바라지하던 일선의 마음 씀씀이, "니 하는 꼬라지 보고 있으면 속 터져 죽겠다!"라면서도 복싱부 학생들의 버팀목이 되고자 했던 교장의 화려한 반어법까지 작품에서 바라볼 영역이 꽤 많습니다. 과연 박시헌이 담금질한 진해중앙고는 당시의 전국체전을 어떻게 장식했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2월 22일 영화관에서 보고 오시길 바랍니다.
영화가 끝나고 시사회 특전으로 L홀더('L'자형 파일 홀더)를 받았습니다. 앞면에는 영화 '카운트' 포스터 이미지를, 뒷면에는 윤우, 일선, 시헌, 교장, 환주 순으로 주요 인물이 차례로 나열된 형태였습니다. 작품이 며칠 뒤 개봉되면 각 영화관마다 특전으로 나눠주지 않을까 합니다. 이미 CGV 스피드쿠폰을 활용해 개봉 첫날로 예매해 뒀는데 실제로는 어떤 게 풀릴지 기대됩니다.
보통 말하는 K-작품에서는 기대감 없이 작품을 보게 되는데요. 시사회로 먼저 만난 '카운트'는 예외였습니다. 요즘 마블 시리즈에서 '무난하다'가 관용적 표현으로 널리 쓰일 만큼 앤트맨과 와스프 : 퀀텀매니아는 한 줌의 팝콘무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기대를 안 하고 본 카운트는 제가 도리어 어퍼컷을 한 대 얻어맞은 듯했습니다. 극한직업처럼 스케일(scale) 큰 대작은 아니지만 "작은 고추가 맵다"는 존재감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어느 품평회처럼 '전투력 측정기(만화 드래곤볼 속 스카우터 같은 도구)'를 끼지 않고 작품을 즐겁게 볼 다음 주 수요일이 기다려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