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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939, 그리고 운암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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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939, 그리고 운암지

커피스푼 2021. 3. 31.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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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가리던 미세먼지가 오후에 물러났다. 이상하다. 분명히 31일까지 대기질이 나쁨 수준을 보일 거랬는데 초미세먼지는 좋음, 미세먼지는 보통으로 나온다. 외출하기 딱 좋은 날이다. 아파트 단지 속 벚꽃은 절정을 갓 지났다. 바람 불면 꽃잎들이 사방에 흩날리고 그 흔적조차 사라지겠지.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카셰어링으로 차를 빌려 나가기는 귀찮았다. 날씨가 좋으면 도로에 차들이 꽉 찬다. 교통 흐름에 막혀 스트레스받느니 버스를 타고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카카오맵을 띄워 가까운 버스정거장 아이콘을 탭했다. 10분 뒤 939번 버스가 온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노선도를 훑어내리니 운암지공원이 나왔다. 운암지? 처음 들어본 곳이었다. 검색해보니 대구 북구 안에선 유명한 공원이라 한다. 카카오맵에 표시된 별 평점도 높았다. 가는 데 걸리는 시간만 1시간 반이 넘는다. 차로 가도 1시간이다. 세상에 대구 동쪽 끝에서 북서쪽 끝까지 가는 노선이라니. 벚꽃 보기 좋고 주변이 깔끔히 정리된 곳이라 칭찬이 자자해서 안 가볼 수가 없었다.

 

도착 5분 전 알람에 맞춰서 집을 나섰다. 버스정거장 앞에 서 있으니 939번 저상 버스가 다가왔다. 내게 939번은 대구스타디움 아니면 대공원역 환승, 시내의 CGV 한일극장을 찾아가는 게 전부였다. 대구에서 환승하며 가장 멀리가본 곳은 계명대 성서캠퍼스였는데 그보다 멀리 다녀오게 됐다. 환승 없이 직통으로 말이다. 앉아가는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보다 창밖을 보니 버스는 동성로를 지나 3호선 모노레일을 따라가고 있었다. 북구 세무서, 침산공원, 엑스코를 거쳐 유니버시아드 아파트 단지로 빙글빙글 돌더니 마침내 하차할 버스정거장인 운암중학교가 보였다.

 

 

버스에서 내렸다. 학교 울타리를 따라 걸으니 길 건너 우측에 운암지수변공원 글귀가 보였다. 입구의 오르막을 따라 만든 계단을 타고 뚜벅뚜벅 오르니 정자를 품은 큰 저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데크와 둔덕이 가장자리를 에워싸고 있었고, 한가운데 우뚝 선 정자는 데크와 울타리로 느긋한 곡선을 그리며 연결돼 있었다. 정자 주변엔 한 무리의 비단잉어가 떼 지어 헤엄치는 모습이 보였다. 주변이 철저히 상업화된 수성못과 전혀 다른 풍경이다. 너무 알려진 장소는 한 번 다녀오면 두 번 다시 안 가게 되는데 이곳은 달랐다. 오히려 가보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운암지 우측 뒤로는 등산로도 마련돼 있다. 에어 건으로 흙먼지를 털어내는 곳도 있는데 주차장은 정작 아스콘이 안 깔려 있었다. 미관을 해치지 않기 위함일까. 간단한 산책으로는 저수지 주변을 따라 천천히 한 바퀴를 걷는 게 더 낫다. 저수지 뒤편 오르막 정점에서 정자를 내려다보는 뷰는 말 그대로 광활해서 보기가 좋다. 해가 비스듬히 넘어가 황금빛을 선명히 쏟아내는 오후 5시~6시쯤에 올라보길 권한다. 수성못 일몰 뷰보다 더 극적이다. 시야를 가리는 다른 건물이 보이지 않아서 뚫어져라 쳐다보게 된다.

 

 

 

뷰를 즐기고 나니 시계는 오후 6시를 가리켰다. 집으로 되돌아가야했다. 이곳을 지나는 버스는 939번 뿐이었다. 일부러 다른 노선의 버스가 겹쳐 오는 정거장까지 10분을 걸어봤다. 그린빌 아파트 단지를 마주한 버스정거장엔 칠곡 전역을 훑고 다니는 버스가 지나기도 했다. 5분쯤 기다리니 회차점에서 불과 몇 정거장을 지난 939번 버스가 왔다. 어느덧 도시엔 짙은 어둠이 내리고 가로등과 간판 불빛이 버스 창을 비추며 지나갔다. 시내는 러시아워와 겹쳐 꼼짝을 못 하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평온했다. 갈아탈 곳을 안 찾아도 되니 얼마나 편한가. 도착한 시각은 오후 8시. 버스 왕복으로 서너 시간을 보냈다. 이동하며 흘린 시간만 보면 지겨울 만하지만 시간 보낼 거리를 따로 챙겨 갈 필요가 없다.

 

'운암지'라는 새로운 뷰 맛집을 찾았으니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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