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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한 숟갈
겨울 산책, 커피 한 잔은 반곡지를 싣고 본문
어제(10일) 주말을 맞아 차 시동을 걸고 커피 한 잔 하러 나왔습니다. 찾아간 곳은 며칠 전 포스팅한 모건커피라운지입니다. 주차장은 어디선가 찾아온 차들이 빈 곳을 하나 둘 채우고 있었습니다. 점심 직후라서 차 댈 곳은 다행히 듬성듬성 남아 있었습니다. 카페 바로 옆에서 운영 중인 자동차 정비소는 셔터를 활짝 열어둔 채 손님 맞을 준비를 하더군요.
주차 후 매장으로 들어섭니다. 오늘은 어느 커피를 마실까 메뉴판을 살피다 맨 위의 에티오피아 코케 허니로 정했습니다. 주요 특징으로 "장미, 블랙베리, 복숭아, 바닐라, 부드러운 바디감"이라는 한 줄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같은 에티오피아 계열인 베라코와 할로 베라티는 시큼하거나 달달한 쪽에 속한 가지치기 품종으로 보였습니다. 마셔 보면 뭔가 다르겠죠?
주문 후 1층 왼쪽 창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언덕 위에는 고즈넉한 사직단이, 우측으로 시원하게 뚫린 왕복 6차선 도로가 보이는데요 창가 바로 앞 야외 공간은 겨울철 캠핑 커피의 감성을 띄우려고 '불멍존'으로 꾸몄더군요. 콘크리트 블록으로 둘러싼 화로 안에는 타다 만 장작과 숯, 그 옆으로 집게가 비스듬히 서 있었습니다. 쿠킹 포일로 감싼 호박고구마를 놔 두기 좋아 보입니다. 초저녁 군불 때는 냄새만 맡아도 시골 감성이 불현듯 피어오르겠군요.
5분쯤 흘러 진동벨이 울립니다. 주문한 드립 커피가 나왔다는 신호입니다. 조심조심 트레이를 가져와 자리로 돌아옵니다. 커핑 노트에 기록된 글씨체는 지난주와 달랐습니다. 커피 내리는 바리스타 분이 바뀌었다는 의미였습니다. 눈대중으로 품종과 특징, 바리스타 이름을 살피고 향을 맡아봅니다. 으레 생각하는 구수함 보다는 뭔가 향긋하고 산뜻합니다. 꽃잎 혹은 말린 귤껍질을 우려서 천천히 내린 듯한 느낌입니다.
조금씩 들이켜며 머금다 넘기며 맛을 느껴봅니다. 첫맛은 밋밋했다가 몇 모금 품고 있으면 새곰한(약간 신) 맛이 느껴집니다. 시중품으로 경험했던 예가체프의 뻔한 특성(시큼 달달함)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목 넘김 후 잔향이 오래 남지 않고 금세 사라집니다. 온기가 어느 정도 달아난 뒤 마시면 바닐라 향과 신 맛이 다소 진해집니다.
오늘의 커피에 만족하며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마셨더니 시계는 어느덧 오후 세 시를 향합니다. 한 시간 조금 안 되게 머물렀군요. 다음 장소로 자리를 뜨기로 합니다. 한가로운 주말 오후를 증명하듯 주차장에는 차들이 몰라 보게 늘어나 있었죠.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반곡지입니다. 10월 중 초가을 풍경을 본 뒤로 두 달 만에 찾아가는 곳입니다. 10분쯤 걸려 도착한 반곡지에는 차들이 즐비했습니다. 주차장 반 바퀴를 돌아 구석진 곳에 차를 대고 내립니다. 흐릿한 날씨에 앙상한 나무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방문객은 끊임이 없었습니다. 이곳의 겨울 운치는 봄, 여름, 가을에 보던 모습과 또 다르거든요.
겨울에는 수면 반사된 왕버드나무의 모습이 한결 뚜렷해집니다. 부평초(개구리밥) 무리가 냉골 같은 한기에 자취를 감추고 저수지의 투명한 물빛은 반곡지에 겨울이 왔음을 증명합니다. 복숭아나무를 베어 낸 좁은 길목은 아직 보도 정비가 한창이지만 물멍으로 우리들의 잡념을 지우는 반곡지 고유의 치유력은 여전합니다.
대구 지역 지상파 방송국 사람들도 자주 찾아갑니다. 주로 이곳에서 드론을 띄우거나 가끔 기상 캐스터를 동반한 현지 취재 영상으로 오늘의 날씨 소개를 다룹니다. 어딜 봐도 그림이 좋으니까 반곡지의 풍경이 시대와 장르를 막론하고 널리 쓰이는 거겠죠? 2016년과 2019년을 장식했던 옛 퓨전 사극 '보보경심 려', '아스달 연대기'에도 시대를 초월한 반곡지의 신비함이 드러납니다.
사진 찍으며 물멍을 때리다 돌고 돌아 왕버드나무 곁으로 향했습니다. 멀리서 봐도 앙상했지만 키 큰 나무의 존재감은 분명했습니다. 해가 구름 뒤로 숨으며 날씨가 쌀쌀해졌는데도 눈앞에는 누군가의 카메라와 삼각대가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금발 머리에 무스탕 코트를 껴 입은 사진 모델도 어떤 포즈로 찍히고 싶은지 의견을 전하기 바쁜 모양이었습니다.
아랑곳하지 않고 현지인처럼 그저 사뿐사뿐 걸어갑니다. 반곡지는 원래 그런 곳이니까요. 주말엔 인스타 속 해시 태그의 성지가 되고 알게 모르게 또 다른 드라마의 배경으로 쓰이며 항상 그 자리를 지키겠지요. 덕분에 근처에 세워진 카페 두 곳(윌로우 반곡 247, 두낫디스터브 반곡지)은 어느 때보다 활발합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어서 눈이 내려서 또 다른 반곡지의 그림이 걸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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