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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한 숟갈
화왕산 여름 등산 후기, 등린이도 오를 만한가? 본문
6월 24일 토요일 아침 8시. 윙윙거리는 스마트폰 진동에 눈을 뜨고 말았습니다. 평소였음 달달한 믹스커피 한 잔과 밀린 유튜브로 시간을 흘렸을 텐데요. 이날은 특별한 하루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여겼던 등산을 하기로 했습니다. 한낱 등린이에 지나지 않아서 동네 뒷산이나 갈까 하다가 무심코 목표를 올려버렸습니다. 가을철 억새밭으로 유명한 '화왕산'으로 말이죠.
집(경북 경산)에서 경남 창녕 화왕산까지는 차로 1시간 남짓 걸립니다. 고속도로보다 일반국도의 접근성이 훨씬 좋습니다. 25번 국도를 따라 밑으로 쭉 내려갔다가 청도 IC 지나서 연결된 20번 국도로 우회전하면 됩니다. 한적한 풍각농공단지 도로를 달리다 차로 폭이 좁아지면 마을을 지나며 고개를 두 번 넘습니다. 왼쪽에 창녕 박물관, 오른쪽에 봉긋한 고분이 눈에 보이면 거의 다 왔다는 뜻입니다. 그다음 교차로 이정표에서 '화왕산군립공원(좌회전)'이 또렷하게 보일 겁니다. 명절마다 외가댁으로 가는 중간 거점(창녕 IC)으로 누누이 학습된 길이라서 한 다리 건너 동네처럼 익숙합니다.
저를 아침 9시 반부터 화왕산으로 인도한 친구는 서울에서 풀냄새 맡으러 온 시승차입니다. 우연한 기회로 폭스바겐의 티구안 올스페이스를 며칠 타 보게 됐습니다. 불금 러시아워 행렬에 휩쓸리기 전에 서울을 벗어났지만 역사와 전통이 서린 수도권 지정체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꼬박 5시간 동안 300km를 달려서 밤 10시 넘어 도착했는데 주말 아침부터 산행이라니. 제 손과 발을 거쳐간 시승차는 좀처럼 편할 날이 없습니다.
화왕산군립공원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1시였습니다. 서늘한 기운이 사라지고 그림자가 한층 짙어지더니 슬슬 후텁지근해집니다. 주차장은 네 군데에 잘 퍼져 있습니다. 입구 주변(대형버스 겸용, 전기차 충전소 있음)과 언덕 부근에 마련된 주차장이 꽤 넓습니다. 화왕산을 좀 아는 등산객들은 마지막 주차장이라 안내된 도성암 아래 공터에 세우는데요. '마지막'이란 글귀에 잘 안 속는 분들은 도성암 근처까지 차를 밀어 올리기도 합니다. 등린이 입장에서 '어차피 거기서 거기' 아닌가 싶은데 여기서도 문 앞 주차의 맛은 놓치고 싶지 않은가 봅니다.
등산을 위한 준비물은 간단합니다. 등산모자, 팔토시, 등산스틱, 등산배낭 같은 메이저 브랜드 장비는 전혀 없습니다. 저수지 둘레길 위주로 돌아본 등린이라서 들 짐은 가볍게 하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바람 잘 통하는 티셔츠에 풀벌레가 안 들어갈 긴 바지, 두툼한 스포츠 양말, 운동화차림이면 충분하지 않나요? 손에 들 건 찬물 가득 담긴 텀블러에 초코칩 과자, 땀 닦을 수건, 물티슈가 담긴 에코백 정도였죠. 등산 레벨이 높은 분들은 허리춤에 라디오 켜는 걸 잊지 않더군요.
첫 주차장에서 등산로 갈림길까지는 대략 20분 걸립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그늘을 천천히 오르면 저절로 마스크를 벗고 싶어 집니다. 농장에서 갓 재배한 감자와 양파, 오이고추, 자두가 진열된 농산물 판매 코너(요즘것들)와 소규모 카페를 지나면 잘 깔린 포장도로와 나무데크 구간으로 이어집니다.
등산로 초입부터는 누런 빛의 시멘트 도로로 지면이 확 바뀝니다. 세 갈림길 입구 한쪽에 세운 안내도에는 등산 난도가 정리돼 있더군요. 자하곡 제1등산로는 어려움, 제2등산로와 제3등산로는 중간에 속합니다. 보통의 등린이라면 자하곡 제3등산로로 올라가서 제2등산로로 내려가는 경로가 알맞은데요. 특별한 경험과 가치를 얻고 싶어서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제1등산로로 등반 후 제3등산로로 빙 둘러가는 코스였습니다.
'어려우면 얼마나 어렵겠어?'라고 제1등산로로 무심코 올랐다간 큰코다칩니다. 화왕산 맛보기 역할을 했던 치유의 숲, 나무 계단, 중간 쉼터인 자하정 구간 이후로 난도가 급상승합니다. 30분 전의 내 결정을 돌리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어깨너비보다 좁은 돌계단을 밟고 일어서면 더 급경사진 바위가 나타나며 네 발 등반을 유도합니다. 물러설 수 없으면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일부 구간은 고대 그리스의 명언을 떠오르게 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했던가요? 암벽 등반하듯 디딤발과 손아귀에 힘을 주지 않으면 미끄러질 만한 구간도 몇 군데 있었습니다. 어려움 구간을 처음 경험한 등린이라면 '진정 사람이 가라고 만든 길인가?'라며 온갖 번뇌가 들어찰지도 모릅니다. 일일이 다 밟고 가라고 만든 동네 뒷산의 계단보다 불규칙적이고 좌우 폭이 비좁습니다. 잠깐 숨 고르기 할 만한 곳은 군데군데 있는데 길게 앉을 만한 곳은 잘 없습니다.
자연이 만든 눈앞의 급경사로엔 관목과 키 작은 나무들이 빼곡합니다. 키 큰 나무들이 만들던 옅은 그늘이 사라지니 햇빛이 뜨겁습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던 땀방울도 주르륵 흘러내려 어느덧 목덜미와 윗옷을 적십니다. 허벅지랑 발바닥은 버틸 만한데 숨이 벅차더군요. 목마름과 허기로 어지럼을 느낄 때쯤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아 쉬기로 합니다.
앞만 보고 부지런히 올라갔더니 산아래 풍경이 새롭게 보입니다. 제1등산로를 고른 내 선택이 뭔가 잘못됐나 의심이 들면 바로 등뒤의 뷰를 보고 판단하길 바랍니다. 창녕군 읍내가 한눈에 보이는 위치까지 올라서면 생각이 바뀝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걸 돌아간다? 오히려 계속 올라갈 에너지를 얻게 될 겁니다. 물은 정상에 오를 때까지 조금씩 적당히 나눠 마시고 초코칩 과자를 한 봉지 뜯어 원기를 채웁니다.
20분이 더 흘러 절벽 꼭대기에 올랐더니 건너편에 산불감시초소랑 화왕산 정상으로 향하는 둘레길이 보입니다. 자하정에서 멀어 보였던 화왕산 정상이 눈에 띄게 가까워졌습니다. 누군가 외치는 "야호!"소리도 더 잘 들리더군요. 산 정상에 오르거든 인증 사진만 조용히 찍고 내려가길 바랍니다. 생태계 균형 유지를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이니까요.
비탈진 급경사로를 내려가다 다시 오르며 찾아간 초소 근처에는 누군가 남기고 간 리본 매듭들이 보였습니다. 거의 다 어느 지역 산악회로 끝나는 방문 흔적이었습니다(사실상 산악회 홍보가 아닐지...). 태양광 발전판 울타리에 장식된 리본들을 보고 있으니 눈살을 찌푸리게 됩니다. 중요 기간 시설에 저렇게 흔적을 남기는 이유가 뭘까 궁금해집니다.
초소 옆 흙길을 지나면 헬기이착륙장과 화왕산성 둘레길이 이어집니다. 보통의 등산로는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 한두 개로 정리되는데 화왕산은 예외에 속합니다. 임진왜란 후 재침(정유재란)을 대비해 산성을 쌓았는데 화왕산성이 그중 하나라고 하더군요. 당시 경상우도 방어사로 임명된 의병장 곽재우가 기지를 발휘해 왜군을 몰아낸 곳이기도 합니다.
둘레길은 성벽을 따라 빙 둘러 만들어져 있고요. 중간에는 억새밭을 구경하기 좋도록 사잇길이 몇 군데 나 있습니다. 불규칙한 산꼭대기 능선을 따라 만든 길이라 단숨에 다 돌기는 쉽지 않습니다. 균일한 흙길이 나오다가 고도가 높아지는 구간에는 돌계단이 차례로 나와서 몇 번 쉬다 가게 됩니다. 제1등산로로 어렵게 올라갔더니 잠시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는 다 돌기 쉽지 않더군요.
화왕산성 동문에서 화왕산 정상까지는 20분 정도 걸렸습니다. 돌계단을 오를수록 달라지는 등뒤의 풍경이 제 발걸음을 거듭 멈추게 하더군요. 어렸을 때 말고 등산을 하지 않았기에 그림이 신선해 보이는 점도 있지만 제주 오름처럼 둘레길이 잘 깔린 곳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구름이 살짝 머물다 가는 비교적 청명한 날씨라서 눈을 두는 곳마다 마음까지 편안해집니다.
화왕산 정상 표지석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한마디로 절경입니다. 날이 좀 더 맑았으면 안내판에 적힌 대로 저 건너 우뚝 솟은 지리산까지 희미하게 보였겠지만 그럼에도 뷰가 좋았습니다. 창녕의 기상(氣像)을 상징하는 산답게 존재감이 뚜렷해서 눈 둘 곳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정상에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길어야 10분 남짓입니다. 제1등산로를 오르며 에너지를 원 없이 쏟아낸 탓인지 내려가는 길은 짧으면서 다소 무난한 제3등산로를 고르게 되더군요. 산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더 위험하다고 배웠기에 경사가 급하지 않은 정도의 하산로가 필요했습니다.
자하곡 제3등산로로 내려가는 길은 제1등산로보다 평이하게 느껴졌습니다. 네 발로 기고 안전밧줄을 붙잡고 힘겹게 오르던 제1등산로와 대비를 이룹니다. 간헐적으로 나오는 급경사로만 빼면 긴장을 늦추지 않는 선에서 발목이 삐끗하지 않도록 조심하면 됩니다. 미끄러지겠다 싶은 구간은 지그재그식으로 걷거나 옆으로 걷는 식으로 하중을 나누면 괜찮습니다.
화왕산 하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50분 정도면 제3등산로 입구에 자리한 도성암이 금방 보입니다. 숨은 안 차는데 발바닥이 아파서 한 두 번 멈추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물집이 잡히지 않게 완급을 조절하며 내려갔더니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목마름은 둘째치고 허기가 찾아오더군요.
도성암 바로 밑 약수터에서 텀블러에 물을 한가득 받아 마셨더니 정신이 맑아집니다. 무색, 무맛, 무취의 평범한 약수가 이렇게나 달게 느껴지다니. 쪼르르 흐르던 화왕산 약수가 마치 냉장고에서 갓 꺼낸 생수만큼 시원했습니다. 원효대사의 해골물처럼 무엇을 하든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깨달음이 오롯이 느껴집니다.
등산로 입구에서 10분쯤 내려왔더니 오전 중에 봐둔 카페가 눈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밖에서 보이는 실내가 꽤 어두워서 잠시 문을 닫고 외출 중이신가 했는데 문이 열리더군요. 외벽에 붙은 메뉴판의 가격은 꽤 합리적이었습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큰 사이즈가 3천8백 원, 아이스 바닐라라떼가 4천 원, 달달한 미숫가루 음료가 4천5백 원입니다. 다른 유명 관광지에 깔린 카페들은 뷰값이 더해져서 최소 5천 원부터 시작되는데요. 제가 찾아간 더빈스는 양심적으로 보였습니다.
뭘로 고를까 하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큰 사이즈를 주문했습니다. 용량은 스벅 기준으로 벤티 사이즈는 되겠더군요. 얼음과 물의 비율, 농도, 커피 에센스의 양을 보아하니 무겁고 고소한 맛보다는 가벼우면서 산미가 살짝 도는 맛이 예상됩니다. 빨대를 꽂아 마셔보니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웬만한 저가형 프랜차이즈 커피보다 깔끔합니다. 다과상에 같이 나온 약과는 서비스라고 하더군요. 보기보다 손님들이 꽤 들어옵니다. 다음에는 진한 수제 대추차를 주문해 봐야겠군요.
커피를 즐기며 30분을 보내다 바로 아래의 농산물 판매 코너를 들렀습니다. 그냥 눈대중으로 둘러볼까 하다가 풋풋한 지역 청년들이 직접 길렀다고 하길래 첫 수확한 오이고추를 두 봉지 샀습니다. 300g에 3천 원인데 막날이라서 두 봉지에 5천 원으로 자체 할인을 하더군요. 맛보기용 자두도 두 알이나 얻었습니다. 딱 오늘 잠깐 열리는 가판대인데 운이 좋았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청년농부 인스타 계정(@yozm_farmers)과 요농이 네이버 블로그(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주차장으로 돌아온 시각은 오후 4시쯤이었습니다. 그늘이 좀처럼 없어서 차 안은 후끈한 건식 사우나 같았습니다. 얼른 시동을 걸고 창문을 살짝 내려서 에어컨만 켜 둡니다. 밖에서 2~3분 서 있다 들어가니 서늘한 기운이 도는 원두막에 앉은 듯 편안합니다. 바로 앞쪽 그늘진 곳에는 캠핑용 간이 의지와 테이블을 펴서 독서를 즐기고 있더군요. 여유를 즐길 줄 아는 누군가의 가족처럼 보여서 보기 흐뭇했습니다.
차를 몰고 곧장 집으로 가려다 코흘리개 시절 뛰놀던 고분에 잠시 머무릅니다. 예전 기억엔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서 가족끼리 김밥을 나눠먹던 곳이었는데요. 역사 유적지 보존 개념이 투철해진 지금의 그림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산책로가 둘레길처럼 보기 좋게 잘 꾸며졌더군요. 곳곳에 말뚝을 박고 줄을 쳐서 고분 위로 올라가지 않도록 관람 동선을 정리했더군요.
명절 오후마다 주차장이 반 이상 차던 곳인데 주말도 발길은 끊이질 않습니다. 20년 전보다 규모가 더 커져서 창녕 박물관 뒤편에 조성된 고분군까지 다 둘러보려면 어림잡아 30분은 잡아야 할 겁니다. 왼쪽으로는 창녕읍내, 오른쪽으로는 저수지랑 논밭이 잘 보입니다. 지대가 은근히 높아서 고분에서 내려다보는 뷰가 멋집니다. 하늘이 붉게 물드는 해 질 녘에 찾아가면 더 그림이 예쁠지도 모릅니다. 화왕산군립공원 주차장에서 차로 5분도 안 걸리는 곳이라 가깝기도 합니다. 관심이 있거든 내비게이션에서 '창녕 박물관'을 찍고 바로 맞은편 고분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됩니다.
고분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드라이브로 채웁니다. 눈에 익은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 고갯길로 차를 밀어 올렸다 내려가는 운전의 즐거움은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안팎은 평범한 독일차 감성의 온 가족 SUV에 지나지 않은데 커브에 맞게 운전대를 부드럽게 감았다 푸는 질감은 웬만한 SUV보다 빼어납니다. 앞바퀴 움직임과 거동을 느끼며 운전대를 조금씩 더 틀어야 했던 스트레스가 없더군요. 티구안 올스페이스의 주행 소감은 차후 자세한 글로 정리할 계획이니 기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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