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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한 숟갈
바빌론 영화, 좋은 작품인가? 본문
어제(1일) 메가박스 대구신세계에서 영화 '바빌론'을 보고 왔습니다. 1920년대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빛과 그림자를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입니다. 삽입곡 'City of Star'로 풍부한 감성을 담아낸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는 194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를 조명하며 눈길을 끌었는데요.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다시 맡은 바빌론은 러닝타임이 아바타 물의 길처럼 확 길어지고 배우 스펙트럼도 한층 넓어졌습니다. 영화 시작 전 예고편에서 들려주던 강렬한 트럼펫 연주만큼 괜찮은 작품이었을까요?
바빌론에서 스토리텔링을 이끄는 주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블 영화에서 '토르'로 나왔던 브래드 피트(잭 콘래드 역),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할리 퀸'으로 이름을 떨쳤던 마고 로비(넬리 라로이 역), 신인 배우로 주목받는 디에고 칼바(매니 토레스 역)가 나옵니다. 주변 인물 중 트럼펫을 신나게 불며 분위기를 주름잡던 조반 아데포(시드니 팔머 역), 파티장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언어의 마술사(무성영화 자막 편집자) 리 준 리(레이디 페이 주 역), 영화 세트장을 겉돌며 시니컬한 영화 리뷰를 남기던 진 스마트(엘리노어 세인트 존 역)도 눈길을 끌더군요.
이야기는 매니 토레스(이하 '매니')가 파티장에 쓸 코끼리를 부르며 시작됩니다. 청년 매니는 허드렛일을 도맡던 멕시코 이주민 출신의 인물로 어렸을 적부터 영화를 동경하고 성공을 갈망해 왔죠. 잭 콘래드가 나타날 파티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다 큰 성인들 눈에도 보기 민망한 장면들이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흥겹다기보다 시끄럽고 지저분하며 역겨운 파티장의 중심에서 소규모 악단이 못 본 척 연주를 펼칩니다. 소위 말하는 '개판 오 분 전(무질서하고 난잡한 상황)'과 비슷합니다. 당대 할리우드의 간판스타 잭 콘래드(이하 '잭')가 나오자 광란에 빠졌던 사람들이 약속된 길을 터줍니다. 파티장에 들어가기 직전 알아듣지 못할 이태리어를 늘어놓으며 아내와 이혼당한 잭이 독한 술들을 잔뜩 시킵니다.
파티장 주요 인사를 안내하던 매니가 계단에 앉아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앞마당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립니다. 남의 자동차로 조각상을 부시고 빨간 드레스를 입은 넬리 라로이(이하 '넬리')가 등장합니다. 넬리는 책임을 물으며 다가선 매니에게 자신을 유명인이라고 소개하다 파티장 주변에 꿍쳐둔 마약 같은 게 없냐며 캐묻기 시작합니다. 창고 안에서 마약을 흡입한 둘은 그렇게 파티장으로 들어갑니다. 유혹의 춤사위로 우두커니 서 있던 매니를 반하게 만들고 무슨 객기인지 무대 중심에서 격렬히 몸을 뒤흔들며 '인싸'가 됩니다. 주고받는 대화 없이 몇 분간 음악과 춤이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세상에 뭔 이런 작품이 있나?' 생각이 들다가도 볼거리는 많아서 계속 스크린을 뚫어져라 보게 됩니다.
그렇게 주변의 관심을 끈 넬리는 키노스코프라는 영화사에서 긴급 출연 제안을 받습니다. 원래 출연이 결정된 배우가 있었는데 파티 중 사고(19금 내용이라 설명 불가)로 촬영을 못하게 됐거든요. 도박장에서 카드를 즐기던 넬리가 환호성을 지르며 밖으로 나갑니다. 급 친해진 매니에게 "잘 지내, 자기"라는 말 한마디 남기며 도둑질한 남의 차로 파티장 정문을 박차고 나섭니다.
날이 밝자 파티장 관리자는 술에 찌들어 퍼진 잭을 집까지 안내하고 오라며 차 키를 매니에게 건넵니다. 으리으리한 규모의 저택으로 들어간 매니는 잭을 부축하며 귀가를 돕던 중 갑작스러운 상황에 넋을 놓고 맙니다. 취객처럼 잠든 줄 알았던 잭이 갑자기 스팀팩을 맞은 듯 헐레벌떡 집 안으로 뛰어듭니다. 겉옷을 벗고 팬티 바람으로 와인 한 잔 들이켜더니 탁자 위에 올라서며 예술을 논하다가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지며 수영장에 풍덩 빠집니다. 매니가 걱정하며 앞마당으로 잽싸게 뛰쳐나갔더니 물에 흠뻑 젖은 잭이 일어서며 "나 좀 잘게. 난 네가 맘에 든다" 하고서 안채에 그대로 들어가 잠을 청합니다. 일반인 눈에는 잭이나 넬리나 "둘 다 제정신 아니구나" 싶을 겁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도착한 키노스코프 영화 세트장은 그야말로 '어수선함' 그 자체였습니다. 엑스트라(단역) 인권을 보장하라는 입구 앞 피켓 시위를 뒤로 한 채 넬리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입장합니다. 소리 없이 흑백으로 작은 화면만 나오던 무성 영화 시절 열악하기 그지없는 촬영장 현장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넬리의 몸과 얼굴을 위아래로 훑던 감독은 "전에 찍기로 한 그 애 어디 갔냐?"라고 묻고 따지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분장을 시킵니다. 넬리가 맡게 된 역할은 술집 손님들을 유혹하는 하녀였습니다. 감독 요구에 따라 삽시간에 표정과 몸짓을 바꾸며 맡은 역할을 해내자 넬리는 영화사 긴급 대체 인력에서 주연급으로 대우가 급상승하게 됩니다.
그 시각 잭을 마중한 매니에게 단역들의 단체 파업을 통제하라는 현장 매니저의 지시가 떨어집니다. 처음에 몇 마디로 죽을 위기를 마주하자 근처에 있던 말에 오르며 양 떼 몰이를 하듯 총을 냅다 갈깁니다. 단박에 통제된 단역들은 중세 병사차림으로 병장기를 들며 전투 씬(scene) 촬영에 돌입합니다. 트럭 짐칸에서는 감독이 윽박지르며 현장 인력들을 마구 갈굽니다. 출연진 대기실에 들어간 잭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창이 날아오는 중에도 전화를 꾸역꾸역 받으며 현장 피드백을 날립니다. 소위 말하는 "날 것"이 가득했던 서바이벌 세트장 같았습니다.
촬영 도중 렌털한 카메라들이 몽땅 부서져 영화를 못 찍는 상황이 되자 매니는 또 매니저의 부름을 받습니다. 해 지기 전에 카메라를 구해 오라는 긴급 퀘스트(quest)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말과 차를 앞지르며 매니저가 건네준 렌털 전문점으로 들어갔지만 재고는 바닥난 상태였습니다. 30분이면 카메라 한 대 올 거라던 말을 믿고 기다리다 거의 2시간이 훌쩍 지나서 카메라가 한 대 들어옵니다. 교통 체증이 걱정된 매니는 바로 눈앞의 구급차로 사이렌을 울리며 일몰 직전 촬영장에 도착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잭은 또 술을 퍼마셨는지 인사불성 상태로 언덕을 기어오르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 얼굴 표정을 싹 바꾸며 연기를 진행합니다. 성공적으로 촬영을 마치자 감독은 매니를 '카메라 보이'라며 극찬하기에 이릅니다.
시간이 흐르며 오랜만에 뉴욕에서 만난 넬리와 매니는 서로의 안부를 묻습니다. 매니는 잭 밑에서 일 잘하는 영화사 매니저로 성장하고 넬리는 무성 영화계의 떠오르는 스타로 이름을 날리던 중이었습니다. 차 안에서 나누던 두 인물의 대화 장면은 라라랜드 속 라이언 고슬링(세바스찬 와일더 역)과 엠마 스톤(미아 돌런 역)이 오묘하게 겹쳐 보였습니다. 넬리는 주변의 주목을 많이 받았지만 도박은 끊지 못했고 매니는 성공을 갈구하며 브로드웨이의 주변 극장을 드나듭니다. 잭이 했던 말처럼 목소리가 나오는 영화가 주목받을 거라며 자신의 의견을 영화사에 피력합니다.
매니의 번뜩이는 제안들로 영화 촬영 기술은 나날이 좋아졌지만 촬영 환경 개선은 늘 뒷전이었습니다. 밀폐된 가건물 스튜디오 안에서 연기하던 배우들, 카메라와 사운드를 조율하던 현장 스태프들의 참을성이 순식간에 바닥나기 시작합니다. X자로 표시한 위치에 가방을 떨궈야 하고 기침 소리도 내지 말아야 하고 문 여닫는 소리까지 내지 말아야 했던 상황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NG(Not Good) 선언이 몇 차례 거듭되며 카메라 감독이 힘들어하는데도 현장 스태프 책임자는 다시 컨테이너 박스로 감독을 밀어 넣습니다. 몇 번을 더 찍고 OK 사인이 났지만 컨테이너 안은 반응이 없었습니다. 쇠고리로 문을 강제 개방했으나 쓰러진 카메라 감독은 그대로 현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죠.
이런 장면들은 당시 할리우드 영화의 어두운 단면(그림자)을 고발하려는 장치로 보였습니다. 매니 덕분에 트럼펫 연주가로 영화 세트장 무대에서 성공한 삶을 맛보던 시드니 팔머(이하 '시드니')의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우아하고 넓은 집, 값비싼 클래식 자동차를 선물로 받고도 자기 얼굴에 검댕칠을 하고 트럼펫을 불던 순간은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얼굴 색깔을 바꾸며 정해진 연주를 하느니 아무 재즈바에 들어가 내 연주를 즐기는 편이 낫다"라고 판단했는지 촬영 직후 집과 자동차를 놔두고 퇴사를 선언합니다. 허름한 재즈바에서 손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 보며 즐겁게 연주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라라랜드 속 세바스찬이 계속 생각나더군요.
유성 영화계에서 인기가 추락한 넬리는 MGM에서 키노스코프로 돌아온 매니에게 잠시 의지하게 됩니다. 매니는 넬리를 세련된 여성 캐릭터로 키우겠다며 기획안을 발표하고 투자를 받으려고 성대한 파티를 차렸습니다. 꽉 끼는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맵시로 나타난 넬리는 품위 있는 대화를 몇 마디 나누다가 싫증이 났는지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매니가 "참고 넘어가자"는 식으로 에둘러 말하며 진정시켰지만 노력은 곧 허사가 되고 맙니다. 넬리는 보란 듯이 게걸스럽게 응식을 먹어 치우며 밖으로 나가더니 다시 돌아와 구토를 합니다. 그 길로 매니와 넬리는 영화사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잭은 어떻게 됐을까요? 매니가 MGM으로 이직할 때 "가서 본때를 보여주고 와"라며 걱정 말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자신의 공허감은 어떤 존재로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헝가리 출신의 연인과 갑작스레 결혼하더니 이혼하고, 미술에 조예가 깊던 아내마저 저버립니다. 편집장 엘리노어 세인트 존(이하 '앨리노어')을 만나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던 인터뷰는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비꼬는 기사의 주인공으로 묘사되고 맙니다.
잭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라며 분을 참지 못하고 엘리노어를 '바퀴벌레'라며 비하합니다. 기사 타이핑을 멈춘 앨리노어는 "우리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당신 옆에 늘 곁에 있었다. 어둠 속에 가려진 바퀴벌레라 할지라도 집이 불에 타거나 지진이 나더라도 우리는 늘 살아남았다."라며 거침없이 받아칩니다. 그녀의 논리에 되받아칠 말이 없던 잭은 그 자리를 빠져나옵니다.
잭은 또 새로운 아내와 대동하며 무성 영화 시절 자막 편집자로 일했던 레이디 페이 주(이하 '페이')를 호텔에서 만납니다. 로비에서 대화하며 뭔가 깨달았는지 잭은 몇 잔의 술을 또 걸칩니다. 페이는 그런 잭의 뒷모습을 보며 한참을 걱정하다 나옵니다. 잭이 아내에게 안심시키며 터벅터벅 계단을 오릅니다. 호텔 직원에게 건넨 팁을 또 한 번 전달하며 뭔가 결심이 선 듯 자신의 객실로 향합니다. 잭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건 바빌론이 상영 중인 영화관에서 확인하면 됩니다.
작품을 다 보고 나니 밤 8시가 됐습니다. 오후 4시 반이 조금 넘어서 상영관에 들어갔는데 러닝타임이 꽤 길었습니다. 아바타 물의 길만큼 분량이 길어서 어깨가 조금 쑤시더군요.
작품을 보고 나니 일반인 눈에는 색채가 너무 강렬하고 수위가 높아서 만족도가 떨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스텔라나 인셉션의 메시지를 이해할 만큼 영화 관람 경험이 풍부한 분에게는 어울릴 수 있는데요. 스트레스 해소 위주로 가벼운 작품을 즐겼던 분들에게는 난도가 높게 느껴질 겁니다. 이전 라라랜드와 다르게 감독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가 너무 많아서 전개 및 절정에서 스토리텔링이 붕 뜹니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특이 연출법도 쓰였더군요. 막판에 눈이 좀 어지러울 수 있으니 잠시만 참아주길 바랍니다.
별 평점은 5점 만점에 3.5점에서 4점 사이가 되겠습니다. 영화 예고편에 나왔던 OST(삽입곡)가 수능 금지곡에 버금갈 만큼 한동안 머리를 맴돕니다. 브래드 피트와 마고 로비의 검증된 연기력은 가산점 0.5점에 해당됩니다. 디에고 칼바는 새로운 발견이라고 칭송할지도 모르겠네요. 뭘 말하고 싶은지 라라랜드처럼 단순화하면서 러닝타임을 소폭 짧게 가졌다면 좋았을 것을, 데이미언 셔젤은 뭘 그리도 욕심이 많았을까요? N차 관람보다는 한 번만 보고 접기에 적당합니다. 돌비 애트모스나 돌비 시네마로 한 번만 보고 오세요. 바빌론보다 25주년을 기념하며 재개봉할 타이타닉이 낫겠다는 생각만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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