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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한 숟갈
그랜저 PHEV? 전기차 충전 인프라는 괜찮고? 본문
지난 27일 전자신문에서 그랜저와 관련한 단독 보도를 지면에 실었습니다. 2025년 현대자동차가 그랜저 PHEV(플러그인 하이브리드)를 출시할 계획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핵심은 한 문단이 채 안 되는데 제목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부실해 보였습니다. 추정성 내용과 조각낸 자료를 추려서 취향대로 엮은 일회성 '짜깁기' 콘텐츠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걸 복사 붙여넣기 하는 주변 미디어의 관행은 관련 업계를 관둔 수년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는군요.
제조사인 현대자동차 입장에서는 위와 같은 매체의 문의, 응대가 익숙할 겁니다. 보통 신차 개발 전략이나 중요도가 높은 분야는 "사실이 맞다, 아니다"를 떠나서 답변할 사안이 아닙니다. 온라인 자동차 커뮤니티에서는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랜저 PHEV' 하나만으로 잠시 술렁이는 분위기였습니다. 자동차에 플러그를 꽂고 빼는 충전 경험이 예전보다 익숙하고 전기차가 대세임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용자층입니다.
반응은 '현실적 대안'이라는 입장과 '충전 부담(스트레스)'을 거론하는 비관적 입장으로 나뉩니다. 이동거리가 짧을 평일에는 전기차, 멀리 나갈 주말에는 내연기관차로 이용하면 된다며 긍정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몇 안 되는 전기차 충전소 앞에서 더 줄을 서거나 제때 자리를 옮기지 않는 일부 운전자 때문에 충전 스트레스가 더 쌓일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두 상황을 모두 겪어본 저로서는 모두 이해가 갑니다. 주행 가능 거리가 100km 안팎으로 짧던 전기차 보급 초창기에는 충전소를 찾아가기 힘든 점만 견디면 참을 만했습니다. 충전 중인 BMW i3 안에서 쉬다가 전기차 충전이 처음인 쏘울 EV 운전자를 도와서 플러그 꽂는 법을 일러주고 제주에서 귤 까먹고 정을 나누며 경험을 쌓았습니다.
하늘색 번호판이 눈에 띄게 늘고 주행 가능 거리가 부쩍 늘어난 지금은 오히려 예전의 낭만을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일부 관공서나 관광지 위주로 깔던 전기차 충전소가 늘면서 접근성은 좋아졌는데 충전 난도는 거주 지역과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의 완속 충전소는 입주민 아니면 이용할 수 없는 비개방형이 많고 충전소 운영 회사에 따라 충전이 '되고 안 되고'로 나뉩니다. 숨은 충전소를 찾았다며 좋아할 무렵 빨간색 사선 두 줄이 펄럭이는 '충전 고장' 딱지는 "그럼 그렇지" 하고 헤헤 웃어넘기는 하나의 작은 일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런 햇살을 등지고 집으로 향하는 오후 6시 반. 근처 200kW 급속 충전소에 2대 충전 가능이라고 떠 있어서 찾아가면 플러그가 꽂힌 전기 트럭, 아이오닉 6 택시를 만나기도 합니다. 마구잡이로 주차된 차들을 비집고 들어가 안쪽 한구석 50kW 충전소에 차를 세우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충전소보다 길 위의 전기차 숫자가 더 많이 늘어서 내가 원하는 시각에 차를 충전하기 쉽지 않은 시대가 됐습니다.
사람과 자동차 둘 다 충전이 필요한 고속도로 휴게소의 점심과 저녁 풍경도 머릿속에 금방 그려집니다. 충전 시간이 짧아졌다 해도 길어진 충전 대기 시간으로 장점이 희석됩니다. 밥 먹는 시간을 앞당기는 변칙 전술을 쓴다 해도 언제나 통하지는 않습니다. 전기차의 양적 증가에 슬기롭게 대처하려면 여유로운 마음가짐과 시간을 쪼개며 충전을 미리 해 놓는 계획적 삶을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충전 경험을 잘 쌓은 운전자는 지금의 전기차도 잘 받아들이지만 그럴 기회가 없던 운전자에게 전기차는 어렵기도 합니다. 사나흘 단위로 급속 충전하고 이마트에 장 보러 가는 김에 잠시 꽂아두면 되겠다고 나만의 전기차 충전 공식을 갖춘 운전자에게는 상황 대처가 유연하지만 5분 안에 주유를 끝내던 내연기관차 운전자들은 전기차를 곱게 보지 못합니다. 충전을 위해 억지로 찾아가는 목적지로 보는 관점과 들르는 김에 찾아가는 휴식처로 보는 관점이 다른 것처럼요.
그럼 전기차 충전 경험이 많은 운전자 입장에서 지금의 충전 인프라는 만족할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충전기 숫자가 늘었다고 충전 환경이 좋아졌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충전소 운영 회사가 늘면서 갖고 다닐 플라스틱 카드도 많아졌습니다. EV 인프라 혹은 GS 에너지플러스 EV 앱을 돌려쓰면서 쓸데없는 휴대품을 줄였지만 운영사가 이렇게나 많을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2011년 카셰어링을 처음 접하며 앞 유리에 플라스틱 카드를 맞대던 시절과 무엇이 달라졌나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차에 플러그를 꽂고 빼는 동작만으로 충전 요금을 결제하는 방식이 그렇게 어려운 기술은 아닌데 운영 회사가 많아지면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꼬이게 됐습니다. 언제까지 카드를 태깅하고 화면에 번호를 일일이 두드리는 수고를 더할지 가면 갈수록 전기차는 내 차가 아닌 경험 데이터를 쌓는 용으로 빌려야겠다는 생각만 그득해집니다.
전기차의 충전 부담을 덜어낸 PHEV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의 대안'에 불과하지만 인식은 나아졌다고 봅니다. 광범위하게 베풀던 친환경차 보조금이 전기차, 수소차 위주로 집중되며 PHEV의 시장성에 물음표를 던지던 시기를 보냈지만 지금의 상황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보조금은 '못' 받아도 세금은 '덜' 내는 HEV를 원하는 고객이 꽤 늘었습니다. "우리의 지구는 온난화에서 열대화되고 있다"라는 유엔 사무총장의 발언, "우리는 남은 인생에서 가장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라고 밝힌 기후 과학자의 SNS 선언은 지구를 덜 괴롭히는 전기차를 받아들일 때가 머지않았음을 알립니다.
1리터에 110km를 간다며 말장난하던 일부 자동차 브랜드의 자세도 진지해졌습니다. 한때 '디젤은 깨끗해'라고 선전했던 폭스바겐 그룹도 지금은 유럽에서 전기차를 실어 보내며 지속 가능한 움직임을 따릅니다. 기름진 미국의 터프한 SUV 명가 짚(Jeep)도 PHEV를 상징하는 '4xe' 모델을 추가하고 첫 전기 SUV 어벤저를 선보였습니다. 고배기량 자연흡기 엔진으로 기름을 축내던 몇몇 미국차들은 지구 곳곳의 산불과 폭풍으로 깨달음을 얻으며 배터리와 전기 모터를 품게 됐습니다.
한국에서 시장성 없다고 내쫓던 LF 쏘나타 이후의 PHEV는 다시 돌아올까요? 유럽과 북미 일부 국가에 팔던 싼타페, 쏘렌토 PHEV도 언젠가 국내에서 볼지도 모릅니다. 내연기관 엔진을 개발하던 부서는 전통적 자동차 제조 기업에서 미래적 모빌리티 기업으로 재편하며 쪼개져서 전기 모터와 배터리 위주의 동력 효율 개선에 힘을 기울일 가능성이 있긴 합니다.
그랜저에서 HEV는 흔했어도 PHEV는 공유한 적이 없었으니 어떤 면으로는 현대자동차의 도전 과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전기차로 바로 넘어가는 제네시스랑 어떤 차별점을 주며 개발을 펼칠까요? 뜬금없이 그랜저 PHEV가 언급되니 더 현대 대구에서 둘러본 볼보 S90 리차지(T8) 모델과 아우디 서대구 전시장에서 살핀 아우디 A7 55 TFSI e 콰트로가 머릿속을 훑고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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