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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한 숟갈
토레스 EVX 시승 후기, 고작 이 정도였나? 본문
며칠 전 토레스 EVX를 시승했습니다. 가솔린 토레스의 전기차 버전입니다. 전기 모터, 배터리를 비롯한 EV 유닛은 BYD(비야디)가 공급하고 개발, 조립, 상품화는 KG 모빌리티가 맡았습니다. 가격은 4,550만 원부터 시작되며 E7 트림에 선택 사양 세 가지를 모두 붙여도 5천만 원이 조금 안 됩니다(세제혜택 반영 기준, 보조금 미반영).
시승차는 E7 트림에 3D 어라운드 뷰 모니터가 추가된 모델이었습니다. 차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전시차에서 못 보던 장식들이 추가돼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KG 모빌리티에서 자체 운영하는 지역 본부 시승차가 아니라 영업 사원 개인 소유의 차를 고객 시승용으로 돌리던 중이었습니다.
시승은 이미 여기서 제한된 느낌이었습니다. 2열 시트 한쪽에는 개인 짐을 실어둔 상태였고 도어 포켓에서 쭉 올라오는 진한 방향제, 앞유리에 시야가 흐릿한 저품질의 틴팅 필름까지 붙어서 토레스 EVX를 시승한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차주를 옆에 태우고 조심히 몰아야 하는 '대리운전' 경험에 더 가까웠습니다.
회사 주인이 몇 차례 바뀌는 동안 잃어버린 고객 접점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습니다. 차를 몰며 사정을 들어 보니 "시승차 운영에 회사 돈이 많이 든다, 영업 사원 개인 차나 회사 차로 시승하는 건 어차피 매한가지 아니겠느냐?"라고 합니다. "차 타면서 단점을 늘어놓고 차를 까는 고객은 어차피 사지 않을 고객이고 우리 입장에서 그런 고객과 상대하는 건 시간 낭비"라며 말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어쩌다 KG 모빌리티가 이렇게 망가졌을까요? 비단 영업 사원의 잘못은 아니라 믿고 싶습니다. 유튜브 쇼츠, 인스타 릴스와 같은 숏폼 콘텐츠로 차 꾸미기에 바쁜 지금의 KG 모빌리티를 보면 이해할 만도 합니다. '회사가 기술력이 모자라도 열정은 살아있다'라며 응원하는 차원에서 친한 대학교 친구에게 티볼리, 지인에게 티볼리 에어 구매를 주선한 몇 년 전의 제가 부끄러워집니다. 한때 제품의 긍정적인 면을 살려 홍보에 나섰던 업계 관계자로서 말이죠.
10분에서 15분 몰아본 토레스 EVX의 주행감은 가히 '절망적'이었습니다. 하체는 지나치게 덜렁거리고 무르며, 운전대 회전에 따른 조향 신뢰감, 해상력도 턱없이 모자랍니다. 출력이나 토크가 일상용 차에 지나지 않은 수준인데 주행 중 좌우로 비틀대며 약한 토크 스티어를 일으킵니다. 코딩으로 해결될 단계가 아닌 상태로 보였습니다. 설계의 부족함을 전자 장비로 보완하려 애쓰는 모습이 그저 안타까웠습니다.
승차감도 일관성이 없습니다. 가감속으로 앞뒤가 들뜨는 범위가 일정하지 않고 페달 입력에 따른 차체의 반응도 고르지 않았습니다. 브레이크 페달은 저항감 없이 스펀지를 밟듯 쑥 밀립니다. 과속 방지턱을 타 넘고 착지하는 느낌은 오래된 승용 세단의 물침대 감성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쁘지 않다'라고 에둘러 말하는 수위는 이미 넘었습니다. 오로지 주행 소음을 줄이는 데 R&D 역량을 다 쓴 느낌입니다.
장착된 휠 타이어는 18인치 크기였습니다. 타이어 규격은 225/60 R18, 제품은 넥센의 로디안 GTX EV입니다. 카셰어링으로 몰던 전기차 EV6의 19인치 출고 타이어와 똑같고 내연기관차로는 더 뉴 투싼 가솔린, 하이브리드 18인치 출고 타이어로 익숙한 모델입니다. 내구성과 마일리지(주행거리)에서 장점이 뚜렷한 컴포트 타이어인데 토레스 EVX에 신겨놓으니까 더 물렁합니다.
서스펜션 세팅이 말랑하면 시트 쿠션도 부드럽고 푹신하게 맞추는 게 일반적인데 토레스 EVX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좌판은 짧고 쿠션이 단단하니까 작은 움직임에도 몸이 쉽게 들썩거립니다. 보기 좋게 만든 실내에 비해서 자동차의 본질인 주행감, 승차감은 놓치고 간 부분들이 많아 보였습니다.
자동차 업계의 공통 언어, 누적된 경험치를 싹 걷어서 밖에 내다 버리고 전자 제품에 네 바퀴만 꽂아둔 느낌입니다. 무거운 배터리 팩으로 무게 중심 내리면 끝인가요? R&H(라이드 앤 핸들링) 부문은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가솔린 토레스보다 대체 나은 게 뭔지 차를 몰수록 화가 납니다. 겨우 이 정도 완성도로 전기차를 내놨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습니다.
인포테인먼트도 운전자 입장에서 다루기 매우 불편했습니다. 큼직한 화면 두 개에 비상등 버튼 한 개만 달았습니다. 나머지는 소프트웨어 접근성으로 AVN(오디오, 비디오, 내비게이션)을 대체한다는 의도인데 운전자를 위한 배려가 전혀 없었습니다. 기능 접근 단계는 최소로 줄이고 논리가 체계적이어야 내 차로 금방 손에 익어서 다루기 쉬운 법인데 토레스 EVX는 '눈에 보이는 뭐든 가리고 비워야 예쁘고 멋지다'라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사용자 경험을 고려하지 않은 소프트웨어는 '있으나 마나' 합니다. 주행 모드는 화면 위에 숨은 바를 밑으로 내려서 눌러야 바뀌고 공조 제어 방식도 첫 화면 왼쪽 바에서 날개 버튼을 건들거나 우측에 숨은 바를 꺼내서 만지는 식입니다. 내부 개발자만 이해 가능한 언어 체계로 앱들을 손질한 느낌입니다.
각 기능의 연결점, 논리성은 단 하나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버튼이 여기 왜 있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지, 어디에 연결시킬지 운전자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며 배려하는 과정이 가장 중요한데 토레스 EVX는 고객들에게 '있어 보이는' 포장이 더 중요했나 봅니다. 다른 차에서 보던 그럴듯한 생김새만 가져오고 편의성은 옮겨 담지 못했습니다.
대충 끼운 전자식 기어 변속 레버도 한몫합니다. 보통 브레이크 페달을 밟은 상태에서 위로 한 번 밀면 R(후진), 밑으로 내리면 D(전진 주행) 모드가 되는데(현대자동차, 기아의 경우 역순) 토레스 EVX는 N(중립) 건너뛰기가 잘 안됩니다. 짧게 두 번, 혹은 3초 이상 길게 밀거나 당겨야 전진, 후진이 됩니다. 계기판 화면을 보지 않고도 주차할 익숙함, 자연스러움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상 타깃(구매 대상 고객)은 주행감보다 거주성(공간), 저렴한 가격에 필수 기능만 갖추면 되는 '저관여' 고객으로 보입니다. 동네 마실, 느긋한 교외 주행 위주로 다니고 차박을 겸한 목적으로 조용히 쓰겠다면 상관없겠으나 다양한 내연기관차, 전기차를 경험해 온 입장에서는 '결코 돈 주고 살 완성도'로 안 보입니다. 모든 부문을 따졌을 때 별 다섯 개 중 두 개를 주기도 아까운 상품성입니다.
물론 누군가는 토레스 EVX를 좋게 바라볼지도 모릅니다. 지방권에서 보조금 받아 4천만 원 안팎, 삼원계 배터리보다 안전하다고 평가되는 LFP(리튬인산철) 배터리, 1회 충전으로 400km 넘게 다니는 전기 SUV라면 합리적이라고 결론짓기 쉽습니다. 아이오닉 5, EV6보다 저렴하고 애매하게 작은 코나 일렉트릭, 니로 EV보다 커서 고르기 좋은 대안 모델로 보이지만 스펙(제원)과 안팎 생김새에 가려진 '허술함, 불편함, 부족함'은 운전자로서 용납하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서울 모빌리티 쇼, 그린 비즈니스 위크에서 느낀 토레스 EVX의 감흥은 이번 시승 경험으로 완벽히 지워졌습니다. KG 모빌리티의 '안일함'을 엿보기 좋은 사례가 됐고 티끌만큼 남았던 '미워도 다시 한번'도 사라졌습니다. 일반인 주목도가 낮은 버스, 트럭 부문에서 조용히 스며드는 BYD의 그림자를 KG 모빌리티는 알까요? 애국심, 도전 정신, 감성 SNS 마케팅에 호소할 시간에 소홀했던 고객 접점부터 둘러보고 제품 개선 노력에 앞장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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